력사전공이 아닌 누군가에게서 성자산 북쪽산정에 동하국의 력사를 나타내는 옛 산정늪이 있다는 말을 들은것 같은데 아무리 뒤져도 해당자료를 찾을바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등산팀 고치이자 조직자인 리경호씨께 여쭈었더니 여름과 가을에 이은 10월 15일 옛 산정늪 등산행이 쭈욱 펼쳐졌다. 늦가을의 날씨치곤 여름같은 날씨다. 연길시가지에서 15선뻐스를 잡아타고 소영촌에서 내리니 등산동아리는 제법 12명대오, 리경호씨의 숨은 노력이였다. 그들로는 “연변문학” 주필이자 연우포럼사이트 포럼장인 김삼씨와 시환경보호국의 리경호씨, 연변도서관의 김수영씨, 뱍향실씨 등에다 길림연대변호사사무소의 지영철씨, 정승필씨 그리고 여성 몇분이였는데 모두가 일정한 등산력사를 갖고 있는 유능한 등산애호가들이였다. 그 가운데서도 김수영씨는 2000년 3월 뾰족산 등반부터 등산을 3년간 꼬박 견지하다가 2001년 4월 연변등산대표팀의 일원으로 한국 국제등산마라촌 경기대회에 참가했고 한국등산학교에서 암벽등반까지 배우며 소문놓은 녀사였다. 성자산아래 서남쪽가 기름창고부근에서 북으로 령을 넘으니 령 저쪽 북녘에 덩실한 외진산이 시선에 맞혀왔다. 등산행의 목적산이였다. 헌데 누구도 길을 몰랐다. 필자도 성자산의 저 자매산은 숙맥이여서 길을 물어야 했는데 산 서남가의 완만한 기슭에 대이니 두갈래 소로길이 나타났다. (그래도 산쪽에 붙은 소로길이 지름길이겠지.) 나랑 몇몇의 주장에 산쪽 소로길에 나서니 이 소로길은 산기슭 옥수수밭으로 통한, 어이없이 막힌 길이였다. 그런대로 따놓은 옥수수이삭사이로 수걱수걱 걷는데 “푸드득”소리와 함께 꿩 한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모두가 환성을 지르는 속에 누군가 “엄마 꿩이다!”, “장꿩이다!” 우스개를 올려 재밌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그 토론속에서 막히는 숲속을 어느결에 헤치였는지도 몰랐다. 옥수수밭 북쪽가 홈채기를 건너 왼쪽 등성이에 오르니 산정으로 통하는 수레길이다. “그러면 그렇겠지!” 등산동아리 선술군 리경호씨가 선두를 긋자 수백메터밖의 산정을 잠간새에 조이였다. 눈앞에는 바자막이를 친 울타리가 나타나고 대문가 막사에서 강아지 한마리가 왕왕 짖어댔다. 잇따라 10살쯤 되여보이는 한족애가 쪼르르 나타나고 아가위(山楂)를 따는 한족로인 내외간이 우릴 맞아주었다. 그때에야 주위를 둘러보니 산정은 동으로 경사지고 움쭉 들어간 개활지대인데 꽤나되는 산정의 밭은 아가위, 사과배 등 과일나무들의 세상이였다. 산정의 밭과 과일나무는 한족내외간의 소유였다. 뒤미처야 안바이지만 바깥로인은 올해 73살에 나는 리학인(李學仁) 로인으로서 산아래 광흥 1대 사람이였다. 원적이 산동인 이 로인은 1952년에 도문을 거쳐 1955년에 이곳 광흥촌에 자리잡았는데 여기 산정의 주인으로 “군림”한지도 어언 35년 철을 잡고있었다. 처음에는 생산대의 땅 3무에 불과했지만 부지런히 가꾸며 쯤쯤이 손을 댄데서 밭면적이 1헥타르로 늘어났다. 사과배에다 아가위 등 까지 심으니 과일나무도 약 300주를 이루어 제법 과수밭으로 변져갔다. 필자가 리학인로인을 잠간 취재하는사이 등산동아리들은 가지 휘여지게 달린 아가위는 연변서 처음 본다면서 맛보기에 여념이 없는가하면 몇몇 녀성들은 과수밭 밑에서 가을민들레캐기에 열을 올리였다. 대풍이 든 이 가을의 풍경, 단풍이 빠알갛게 든 이 가을의 마지막 풍경은 동하국의 숨결 어린 여기 산정에도 그대로 연연했다. 풍년든 산정을 일별하노라니 저 아래 발치에 인공늪을 방불케 하는 애어린 늪이 보이였다. 저 늪이 최근년간의 산물인가고 묻자 리학인로인은 “선머? 이징치빠바이낸라!” (뭐, 이미 700~800년이 되네!) 하고 대답했다. “7~800년?” 나는 잘못 듣지나 않았나하여 다시다시 물어도 그 대답은 드팀없는 700~800년이다. 이곳이 원적이 아닌데 어떻게 아는가고 물으니 박물관에서도 오고 연변일보 한족기자들도 오가며 들은 풍월이란다. 어찌하든 늪의 력사가 700~800년이면 천년고도(古都)를 자랑하는 동남쪽건너 성자산의 동하국력사와 맞아 떨어진다는 말이된다. 이런 늪을 누가 반기지 않겠는가, 나와 김삼주필, 김수영씨, 리경호씨, 박향실씨 등은 늪가를 조용히 거닐며 동하국의 옛 숨결을 가늠해 보았다. 여기 산행의 목표가 바로 이 천년의 유구한 력사를 거치여 온 동하국의 옛 산정늪을 답사하는것이였다. 보매 옛 산정늪은 최근년간의 금시산물이나 다름없이 패워있었는데 너비는 불과 10메터 안팎이고 주변에는 한그루의 버드나무와 여러 그루의 과일나무들이 그림같은 풍치를 그려주고있었다. 늪면은 푸른 늪이끼로 덮히여 있었지만 손으로 가시고 보니 맑디맑은 물이였다. 로인내외쪽에 대고 소리치니 늪의 깊이가 한메터반은 잘 된다지 않는가. 찰나 나는 까알깔거리며 목욕에 여념이 없는 그 옛적 동하국의 궁녀들을 보는듯 싶었다. 이어 가마타고 성자산을 빠져나와 이곳 산정늪에 오르는 궁녀행렬이 보이며 동하국 그 시대를 떠올렸다. 지금에 이르러 내 고향 연변에 널리 알려진 성자산성은 연길시 동쪽 10킬로메터 되는 기름창고 뒤면산이다. 말발굽모양으로 움푹하게 패여들며 산정평지를 이룬 산정에는 주위 산발을 따라 산성이 근 10리나 뻗었는데 지금도 돌로 구축된 옛 산성모습을 가끔 볼수있다. 옛 품위를 도드라지게 보여주는것은 기름창고 뒤산산정으로서 이곳에는 높이가 2메터도 넘고 길이가 10여메터나 뻗은 돌성벽이 그대로 드러나 등산객들과 답사자들을 반긴다. 이미 밭으로 되여버린 산성내 옛 궁터자리에 이르면 깨여진 기와쪼각들을 흔하게 볼수있는데 그만큼 력사 또한 유구하다. 고구려시기까지 소급한다니 더욱 그러하다. “연길시문물지”나 “연변문물간편”에 따르면 성자산성은 고구려시기에 구축되여 그후 발해, 료나라, 금나라시기를 거치여 온 것으로 알려진다. 금나라 말기에 금나라 통치게급내부의 모순이 격화되고 분화되면서 금나라 료동선무사 포선만노가 반기를 들면서 선종정우 3년, 즉 1215년 10월에 동경인 오늘의 료양에 대진(大眞)국을 세웠고 녀진인의 옛지대로 옮겨앉으면서 국호를 “동하”라고 불렀다. 력사상 수명이 짧은 동하국의 출현인데 동하국 포선만노는 그의 행도남경(行都南京)을 성자산성에 두었다. 허나 동하국의 력사는 너무나도 짧았다. 기원 1223년에 흥기하던 몽고기병이 성자산성을 휩쓸면서 동하국은 패망의 고배를 마시면서 력사무대에서 사라져야 했다. 건국 19년만의 액운, 그때 동하국 수령 포선만노가 곧바로 성자산성에 머물러 있었다고 력사는 전하니 성자산성-동하국의 이 남경은 에누리없는 동하국의 정치, 군사의 중심지였다. 력사로 보는 동하국 그리고 성자산성의 유래라 하겠다. 아마도 그 시절에 이곳 산정의 인공늪은 동하국 궁녀들과 귀족들의 놀이터로 무척이나 활기를 띤것 같다.리로인은 이곳 산 이름이 “위츠(浴池)산”이라고 했는데 필자는 처음 위츠(鱼池)산, 즉 물고기늪산으로 리해했다. 그러면서 궁녀들의 목욕터로 자리잡히는 데는 어찌할수가 없었다. 후에보니 욕지산(浴池山)이 옳았는데도 말이다. 우리 일행 몇몇은 옛 산정늪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동료 김삼주필이 정성다해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그 시각 나의 가슴은 토끼를 품은듯 콩닥콩닥 뛰였다. 동하국의 옛 산정늪을 종내 찾고야 말았다는 기쁨의 발로였다. 이윽고 산행동아리들은 밭 북쪽 산등성이의 봉화대를 찾아보았다. 봉화대주변은 온통 낮다란 나무숲으로 둘러 쌓이였는데 꼭대기에는 깊숙한 구덩이가 패워있었다. 그 서슬에 돌로 쌓은 측면이 드러나 여기가 그 옛날 봉화대자리였음을 알려주고있었다. 봉화대 답사를 마치고 서쪽기슭으로 내리는데 서남쪽 언덕너머 연길시가 한눈에 안겨들었다. 그에 따른 연길분지며, 광흥골안, 부암골안이 발치에 펼쳐져 그야말로 가관이였다. 그러니 이곳산정은 삼면이 크고작은 강으로 둘러 싸였는데 오늘날은 실개천에 지나지 않는 광흥골, 부암골이 그 옛날에는 나무숲사이로 제법 출렁이며 흐르는 강물이였을것이다. 연길시에 살면서 연길시와 도문시 구간의 이같은 다른 세계 모습을 처음 대한다는것이 그리도 반가울리가 없었다. 다시 산등성이 아래 원지로 돌아오니 더욱 희한한 정경이 발목을 잡았다. 산정의 대문가에 동하국의 력사를 보여주는 정자 기초돌들이 동그랗게 그대로 나타나 있었던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니 정자자리가 또 나타났는데 역시 동그란 원을 지은 상태였다. 그러니 완만한 서쪽 기슭을 따라 오르는 이곳 산정에는 엣 정자만 해도 눈에 띄우는것이 두곳으로 알려졌다. 산행동아리들은 흥분에 젖어들었다. 등산을 위한 등산만이 아닌 력사 문화답사로 이어졌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웃쪽켠의 평평한 정자자리에 점심밥곽을 풀어놓으니 우리 일행은 그제날 궁녀들이 노닐던 자리를 차지한 셈이였다. 동쪽을 보고 서쪽을 보아도 이곳 정자자리는 사방을 한눈에 굽어볼수있는 명당자리임이 력연했다. 옛사람들의 지리적 선택에 머리가 수그러졌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해 늦가을의 오후 한때, 늦가을의 단풍을 즐기는사이 나와 김삼주필, 김수영녀사 셋은 다시 산정답사길에 나섰다. 산정의 과수밭을 질러 동쪽가로 나아가니 와—환성이 저절로 터져올랐다. 동쪽가는 깎아지른듯 경사도가 급한 산지대인데 성자산을 에돌아 하룡을 거쳐 마반산쪽으로 빠지는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합수물이 유유히 흐리며 거대한 영어자모 “U”(유)를 만들어내니 환성이 터지지 않을수 없었다. 연길시 동쪽변두리에 개발되지 않고 세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같은 천하절경이 있다는것이 쉽사리 믿겨지질 않았다. 성자산에서도, 하룡쪽산에서도 느낄수 없고, 볼수없는 여기만의 대자연의 걸작이였다. 우리 셋은 바로 산과 산 사이를 따라 동북쪽으로 흐르던 강물이 산에 막혀 다시 서북쪽으로 굽이를 타며 우리쪽으로 다가서다가 이곳 산밑에서 또 굽이를 북동쪽 산사이로 돌리는 중심지대에 서고있으니 대자연의 신비에 한껏 들떠올랐다. 김삼주필은 과연 천하절경이라며 이곳을 관광코스로 잘 개발하면 좋겠다고 속셈을 터놓았다. 그날이 언제일가?! 기대가 가는 마음이였다. 아쉬운대로 자리를 옮겨 북쪽 산등성이의 봉화대를 다시 찾으니 첫 인상과 확연히 달랐다. 인공축조로 된 봉화대와 봉화대를 에돈 물도랑홈이 그대로 펼쳐졌다면 돌과 돌을 이어놓느라 직각으로 쪼아놓은 돌 한점까지 발견되여 수확이 대단했다. 흥분속에서 일행셋은 봉화대 서쪽 기슭 풀밭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김수영녀사의 청에 의해 풀밭에 누워 천고마비의 10월의 가을하늘에 눈을 주었는데 그 느낌이 전에없이 좋았다. 그러노라니 지난 여름의 막바지에 한패의 한국인들 안내차로 김수영씨, 리경호씨와 더불어 백두산 북쪽비탈과 서쪽비탈로 백두산 산정에 오르던 때가 생각났다. 그나날 도보로 북쪽비탈로 백두산정에 오를 때도 수영씨의 제의로 풀밭에 누워 푸르른 하늘을 감상한적이 있었는데 서서보기와 누워보기가 그 느낌이 전혀 다르다는 수영씨의 말이 피부로 느껴졌다. 대자연의 품속에 안긴다는 그 기분은 과연 별멋이였다.
어느덧 귀로에 올라야 했지만 연연한 이음산이 아닌 성자산에 이어 그 북쪽가에 또 외홀로 솟은 옛스러운 이곳 산정이 전에 없이 정다이 안겨들었다. 흘러간 력사속에서도 그 위용을 잃지 않으려고 곳곳에 옛모습 드러낸 성스런 산이여서일가, 아니면 성자산성과 더불어 옛기운 서린 동하국의 숨결 깃들어서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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